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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잼민이가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폴 세잔

하늘이푸른오늘 2026. 3. 2. 15:53

이번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 함께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인 폴 세잔 위키백과를 정리했습니다. 정리한 내용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여기를 보시면 됩니다.

폴 세잔의 아버지는 은행 설립자였습니다. 폴 세잔은 한마디로 금수저였죠. 인성은 별로였답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건 아니고 짜증 잘내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정도였습니다. 평생 친하게 지내던 화가는 피사로를 비롯해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은행을 물려받길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성과는 별로였던 모양이고, 2년 뒤 22살이 될 때부터 미술을 시작했습니다. 그리 빠른 편은 아니죠.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파리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잔은 그다지 그림을 잘 그리는 편이 아니었습니다. 파리 최고의 미술 교육기관인 에콜 데 보자르에 지원했다가 낙방해서 아카데미 스위스라는 곳에서 공부하면서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사귀기도 했지만 자신의 그림 실력에 실망하여 다시 고향에 내려갔다가 파리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아래는 아버지의 허가를 받아, 응접실 벽에 그렸던 벽화로, 좌측부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1960년, 21살 때의 그림이니 그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때의 그림이긴 합니다만, 인체 비율도 안맞고 배경에 비해 피사체들이 뜨는 듯하고... 그저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싫어했다는 앵그르(INGRES) 이름으로 서명을 해뒀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성공한 화가가 되기 위한 필수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살롱 드 파리에 여러번 작품을 제출했지만, 매년 거부당했습니다. 맨 마지막엔 살롱 심사위원이 된 친구 덕분에 한점을 출품하긴 했지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 다음부터는 살롱에 작품을 내지 않았습니다. 

74년에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를 했습니다. 세잔의 그림 스타일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회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피사로가 밀어붙였기에 가능했었습니다. 아래는 세잔이 출품했던 《현대 올랭피아》입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를 오마주한 그림입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켰던 것은 물론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였습니다만, 이 작품도 그에 못지 않게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 작품이야 말로 전통적인 아카데미 미술에 익숙해 있던 관객들에게 그리다 만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마네는 세잔을 "미장이용 흙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벽돌공"이라고 칭했을까요. 

《현대 올랭피아》, 1873-74년경, 46.2 x 55.5 cm, 오르세 미술관

예를 들어, 아래는 그 다음해인 1875년 살롱에 출품되었던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의 《플로라와 제피로스》입니다. 이런 그림만 보다가 세잔의 그림을 본 관객들은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의 《플로라와 제피로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습니다. 손실액을 참여한 화가들이 분담을 했는데, 개인별로 185프랑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세잔은 그림을 한점 판매했습니다. 아래의 《목매달린 사람의 집》이었습니다. 미술품 수집가에게 팔린 세잔의 최초의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아직까지 세잔 전성기 때 보이는 특유의 붓터치가 보이지는 않고, 인상주의 스타일도 그다지 나타나지 않은 풍경화이지만, 세잔은 특히 정물화와 풍경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 뛰어났습니다.

《목매달린 사람의 집》, 1873, 55 x 66 cm, 오르세 미술관

세잔은 평생 수많은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것은 《생트빅투아르산》 연작입니다. 약 80점을 그렸습니다. 아래는 그중 하나인 《큰 소나무가 있는 생트빅투아르산》입니다. 세잔의 풍경화는 자연을 그대로 화폭으로 옮긴 것이 아닙니다. "자연에서 그리는 것은 대상을 모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것의 감각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한 것처럼, 자신의 느낌과 감각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큰 소나무가 있는 생트빅투아르산》, 1887년경, 67 x 92 cm, 런던 코톨드 갤러리

아래 그림도 생트빅투아르산 연작중 하나인 《생트빅투아르 산과 샤토 누아르》중 일부를 확대한 것입니다. (얼마전 동경에서 직접 본 작품 중 하나입니다. ㅎㅎ) 세잔의 작품은 이렇게 그라데이션 없이 뚝뚝 끊어진 색면으로 칠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처음 보면 우리가 보던 일반적인 풍경화와 달라서 이상해 보이지만, 볼 수록 강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생트빅투아르 산과 샤토 누아르》, 1904–1906, 65.6 × 81 cm, 도쿄 아티존 미술관

정물화도 마찬가지로 자세히 살펴보면 색면으로 구성됩니다. 아래는 세잔의 정물화중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인 《사과 바구니》입니다. 세잔의 정물화는 색면으로 구성되었다는 점 외에도 일반적인 원근법을 무시했다는 점이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책상을 보면 우측이 높고 좌측이 낮습니다. 병은 기울어진 듯 보이고, 병 우측에 있는 과자?는 위에서 본 듯이 그렸습니다. 일반 정물화처럼 어느 한점을 기준으로 일점투시하여 그린 것이 아니라, 각 부분별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위치에서 그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그림 내에서 여러가지 시점을 표현한 것이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의 입체파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한 이 과일들을 보시면 오렌지인지 복숭아인지 사과인지 모르게 원래의 색채와는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의 모습이 아닌,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색을 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이 앙리 마티스를 비롯한 야수파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과 바구니》, 1893년경, 65 x 80 cm, 시카고 미술관

이렇게 실제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할 필요 없이 자신의 느낌과 감각을 표현한 것이 세잔의 특징이고, 이것이 피카소와 마티스가 "세잔은 나에게 유일한 스승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던 이유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품은 무명 화가였던 세잔을 거장의 반열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의 초상입니다. 초상화 마저도 인물을 그대로 표현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말했던 여러가지 특징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초상화를 그릴때  총 115회에 걸쳐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균형을 잡으며, 수 시간 동안(대략 오전 8시부터 밤 11시 30분까지) 완전히 부동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른손 부분에 색이 칠해지지 않은 곳이 두군데있는 "미완성작"입니다. 미완성된 부분에 맞는 적절한 색상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완벽주의자였죠.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 1899년, 101 x 81 cm, 파리 프티 팔레

세잔의 평생이 그랬습니다. 순간적인 빛의 느낌을 표현하는 "인상주의를 박물관의 예술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던 뜻을 이루기 위해 평생동안 노력했습니다. 세잔은 천재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었죠. 오죽했으면 그의 고향에서 "도시를 불명예스럽게 하고 있다"며 떠나라고 배척당하기까지 했죠. 성격조차 까칠해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했고요. 하지만, 약 40년간의 화가 활동동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이루려 노력한 그는 결국 현대 미술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노력의 천재라고 해야겠네요.

위키 백과 정리

아래는 제가 폴 세잔을 정리하기 전, 틀:폴 세잔을 캡처한 모습입니다.

아래는 현재의 상황입니다. 

정리하는 기준은 여기를 보시면 되는데, 대략 영어 Template:Paul Cézanne에 있는 문서를 모두 번역하고, 기타 언어링크가 5개 이상의 작품을 추가로 프랑스어 문서를 찾아 추가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5개의 문서를 추가로 번역했네요.

이상입니다.

민, 푸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