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카사트(Mary Cassartt, 1844년~1926년)은 프랑스 인상주의자 화가였습니다.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살 때부터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당찬 여성입니다. 그렇지만 카사트는 베르트 모리조 등의 여성 인상주의자들과 함께, 1986년 타마르 가브의 《여성 인상주의자》가 출판되기 전까지 인상주의 작가들을 다루는 미술사 교과서에서 대부분 누락되었습니다. 심지어 미술사 관련 서적중 가장 유명한 교양 서적이라 할 수 있는 E.H.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초판에는 여성 화가들이 한명도 등장하지 않습니다(16판에 겨우 한명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때문에라도 메리 카사트가 결혼도 하지 않고 독립적인 화가로서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그림 세계를 열어간 그녀를 현대 페미니스트 미술 평론가들이 그녀를 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칭송하는 이유라고 보입니다.
카사트의 그림 실력은 타고 났던 모양입니다. 22살 되던 1868년에 파리 살롱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할 수 있었고(우리나라로 따지면 국전에 입선했다... 정도 될 것 같네요), 이후 76년까지 7년간 계속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였습니다. 아래가 메리 카사트가 1868년에 그린 《만돌린 연주자》로서, 파리 살롱에 전시된 작품입니다.

사실 메리 카사트는 여성 화가로서 차별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당대에 여성화가가 완전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 무시되거나 경멸의 대상이었거든요. 1877년에 두 작품을 거부당한 후로 다시는 살롱에 출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로 이때 평생의 친구이자 멘토였던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년~1817년)를 만나 인상주의에 입문하게 됩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1974년에 있었고 그 이전부터 귀스타브 쿠르베, 에두아르 마네 등이 정통 아카데미 미술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하고 있었지만, 메리 카사트가 인상주의에 들어선 77년까지도 인상주의는 한마디로 "인상쓰게 만드는" 형편없는 미술로 취급받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드가 드가의 파스텔화에 푹 빠져 있던 메리 카사트는 드가의 초대를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고, 1879년에 열린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부터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래는 카사트가 제일 처음 참석했던 1879년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전시된 작품으로, 《박스석의 진주 목걸이를 한 여인》입니다. 밝은 색을 위주로 사용하고 뒷 배경의 터치까지 인상주의의 느낌이 많이 납니다. 특히 아래 그림은 주인공(카사트의 언니 리디아)이 뒤에 큰 거울이 있는 오페라하우스의 박스석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뒷 배경을 거울로 사용한 작품으로는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다만 《폴리베르제르의 바》는 1882년 작품이니 메리 카사트가 그 작품을 참조한 건 아닙니다.

사실 메리 카사트는 이런 저런 일이 겹치지 않았다면 아카데믹 화풍으로 계속 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1874년에 있었고, 메리 카사트도 이미 파리 미술계의 변화를 알고 있었거든요. 만약 파리 살롱에서 거부된 사건이나, 존경하던 드가와 함께 일하게 된 일이 아니었다면 아카데믹 화풍을 고수한, 고만 고만한 초상화를 그리던 수많은 화가들 중의 하나가 되어 잊혀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상주의 운동은 이미 60년대 부터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두아르 마네를 중심으로 파리 클리시 가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에모여 자신의 예술의 이상에 대해 토론하였고, 결국 관제 파리 살롱과 결별하는 인상주의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리 카사트는 이 모임에 참가하고 싶어도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적어도 어느정도 신분이 있는 여성들은 혼자 야외로 외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 카사트와 베르트 모리조를 비롯한 여성 인상주의 화가들은 풍경화를 거의 그리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카페에도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카페에 출입하는 여성은 신분이 낮은, 거의 몸파는 여자 수준 취급을 받았거든요.
인상주의 전시회는 1886년 제8회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열리지 않았습니다. 참가했던 화가들은 각자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화풍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마리 카사트도 아래 《아이의 목욕》처럼 좀 더 사실주의쪽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작품이 카사트의 대표작입니다.

아래는 1898년 경 작품인 《어머니와 아이》입니다. 위의 그림을 포함해서, 인상주의 모임이 깨진 후로 카사트가 그린 그림은 거의 모두 이렇게 어머니와 아이의 애틋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성모자상을 현대적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아기 예수의 자세와 이 그림의 아이의 자세가 많이 비슷하며, 배경에 있는 거울이 후광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그렇게 해석합니다. 물론 메리 카사트가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아래는 카사트가 51세가 되던 1905년작 《해바라기를 든 여인》입니다. 메리 카사트는 평생 여권 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 그림은 1915년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 캠페인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열린 전시회에 출품된 카사트의 여러 작품 중 하나로, 해바라기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아이 그림을 주로 그렸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을 겁니다. 여성의 활동 제한으로 인해 실내 장면을 위주로 그려야 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을테지만, 소박한 여성적 환경을 묘사하여, 여성의 환경, 노동, 우정, 그리고 사생활을 고급 예술로 승화하려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메리 카사트가 치열함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메리 카사트는 1910년 이집트로 여행을 가서 고대 이집트 미술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고는, "나는 정복당해버렸다. 나의 나약한 손은 이 과거의 예술이 내게 준 영향을 그림으로 옮길 만한 힘이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 메리 카사트는 1910년 이후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거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참고: 메리 카사트의 작품목록)
이에 비해 일본의 유명한 우키요에 화가인 가쓰시카 호쿠사이는 평생 2만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고, 88세에 세상을 떠날 때, "하늘이 내게 10년만 더 준다면... 아니 5년만 더 준다면, 진정한 화가가 될 수 있을 텐데"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화가로서 살았지만, 제가 보기엔 끈질김이 부족했고 그러한 점 때문에 자신만의 길을 개척할 수 없었고, 결과적으로 잊혀진(무시된) 화가가 된게 아닐까...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아니라, 화가로서의 집요함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그리젤다 폴록과 같은 후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는 메리 카사트를 띄워주려고 노력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인 주도적인 여성 운동가의 모습은 아닌 듯합니다. 말년에 페미니스트의 활동이 별로 안보이는 것은 제가 다른 사료를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치열함이 부족한 분이 정말 자신을 바쳐 페미니스트 활동을 하였을지... 하는 의문이 드네요.
위키백과 정리
아래는 정리하기 전 틀:메리 카사트입니다. 세 개의 작품이 위키백과 페이지가 있는 걸로 나오는데, 사실 처음 두 개는 일반 항목으로 연결된 링크입니다. 그러니까 딱 한개 문서만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그림중에서는 "차" 라는 작품하나 빼고는 모두 정리했습니다. 제가 정리한 기준은 기본적으로 언어 링크수가 6이상인 작품을 정리하는 겁니다. 만약 이 조건에 부합하는데 영어 문서가 없는 경우에는 프랑스어 혹은 다른 언어 페이지를 번역해서라도 채우는데, 이번엔 그런 작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상입니다.
민, 푸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