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색과 어두운 초록색이 지배적인 캔버스에 무표정한 미녀가 관람객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머리엔 화관, 가슴에는 꽃 한송이가 꽃혀 있고 오른손에는 유리 구슬을, 오른 손에는 꽃나무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좌우 근경으로 나무들이 있는 등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연상시킵니다.
이 그림은 라파엘 전파 화가 중 가장 뛰어난 여류 화가라는 마리 스파르탈리 스틸먼의 《마돈나 피에트라 델리 스코로비니》라는 작품입니다. 제목은 "스크로베니가의 피에트라 부인"이라는 뜻으로 피에트라는 돌(Stone) 이라는 뜻입니다. 그림 뒷편에 초록색 바위들과 멀리 원경에 뾰족한 바위산이 있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마리 스파르탈리 스틸먼은 모델 출신의 화가입니다. 아버지가 런던 주재 그리스 총영사였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험한 모델일을 할 필요가 없었던 분이죠. 그런데 영국의 극작가 앨저넌 찰스 스윈번은 그녀를 보고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자리에 앉아 울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을 만큼 미모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집안 파티에서 화가들을 만난 화가들, 특히 라파엘 전파의 핵심 멤버인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을 위해 모델을 섰습니다.
그러다가 그림에 흥미를 느껴 포드 매독스 브라운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왕립미술원 전시회에도 출품할만큼 출중한 그림 실력을 자랑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아래는 그녀의 대표작인 《사랑의 메신저》입니다. 비둘기가 날라다 준, 붉은 실에 묶인 편지를 받는 여인을 묘사했습니다. 이 그림에 묘사된 비둘기, 장미, 담쟁이덩굴, 눈을 가린 쿠피도 등의 상징들은 "변함없는 사랑, 믿음, 만개한 사랑스러움"을 암시하는 동시에 "쇠락 직전의 아름다움, 관능, 그리고 쿠피도의 화살이 가져올 수 있는 고통"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고통을 함께 의미하는 거죠.
저는 이 그림을 보먼서 한폭의 그림 같은 창문밖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동양화같은 느낌도 들고요. 잔잔한 물에 비친 나무의 반영들이 그림 속으로 빨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
라파엘 전파로 분류된 화가중에는 여성분들도 몇몇 있습니다. 그 중에서 마리 스파르탈리 스틸먼 다음으로 유명한 분이 에블린 드 모건입니다. 이 분은 우의적인 주제로 여성 인물화를 주로 그렸던 분이었습니다. 15세부터 미술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시간의 낭비"로 치부하며 그림에 "올인"했습니다.
아래 왼쪽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꽃의 여신 《플로라》이고, 오른쪽은 트로이를 멸망으로 이끈 원인이 되는 헬레나 왕비입니다. 드 모건은 이런 그림을 좋아했고 여러 작품을 남겼습니다. 원근법을 무시하는 듯한 평면적인 그림, 그리고 캔버스 전체를 세밀하게 그리는 기법 등 라파엘 전파 양식이 두드러지고, 여성의 자세나 구도 등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이 생각나게 하는 그림들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드 모건은 다른 누구보다 훨씬 라파엘 전파의 양식에 가까운 작품을 그린 분이었습니다.
![]() |
![]() |
| 《플로라》(Flora), 에블린 드 모건, 1894년경, 199 x 88 cm, 영국 위티크 저택 | 《트로이의 헬레네》(Helen of Troy), 에블린 드 모건, 1898년, 124 x 73.8 cm, 영국 위티크 저택 |
에블린 드 모건은 어릴적 미술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평생동안 미술에 헌신했으며 독특한 화풍을 개발했지만, 그녀는 작가로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녀는 1907년부터는 아얘 그림 전시를 포기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은 몇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드 모건 재단에서 소유하고 있는, 즉 화가가 간직하고 있던 작품들이었습니다.
드 모건은 이러한 현실에 무척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지지하는 등 페미니스트 활동에도 나섰습니다. 아래는 그녀의 말년 작품 《금빛 새장》(The Gilded Cage)입니다. Gilded cage는 부유하지만 자유가 없는 환경을 뜻하는 대표적 관용구라고 하네요. 화려한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이 손을 뻗어 간절한 눈빛으로 창밖으로 지나가고 있는 무용수들과 음악가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발 아래로는 책 한권과 깨진 보석 장신구가 널브러져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이러한 여성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늙은 남성이 보입니다.

이 그림의 내용을 살펴보다가 예전에 이런 내용을 들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AI 챗봇을 사용해 여러번 검색한 끝에 제가 생각했던 작품이 엔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이란 걸 알았습니다. 구체적인 스토리는 제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랐지만, 유복한 가정 생활을 하고 있던 여인이 맨 마지막에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닫고 가정을 버리고 떠난다는 이야기는 같더군요.
사실 미국에서 연방 차원에 여성 참정권이 인정된 것이 1920년이었고, 영국의 경우 여성 참정권이 전면 인정된 것이 1928년이었으니,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로 보면 이 그림에 담긴 내용이 당시로서는 어쩌면 당연할 수 있었겠다 싶네요. 한편으로는 그런 현실이었다보니 여성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것도 사실인 것 같고요.
이상입니다.
민, 푸른하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