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미술 공부

완벽한 기교 그러나 길을 잃은 거장: 존 싱어 사전트

하늘이푸른오늘 2026. 3. 16. 22:00

지금까지는 대부분 후기인상주의 화가를 정리했는데, 이번엔 이 분들과 비슷한 시대에 살기는 했지만,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인 분의 위키백과를 정리했습니다. 정리한 내용은 여기를 보시면 됩니다.

존 싱어 사전트(1856년~1925년)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아주 잘 그린 분입니다. 얼마전 글을 쓴 앙리 루소폴 세잔과는 다르게 말이죠. 가족들이 전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살았기 때문에 정규교육은 받지 못해서, 처음엔 어머니에게, 그 다음엔 무명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좋았다고 합니다. 18살되던 1874년에  프랑스 최고의 미술 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단번에 합격할 정도로 말이죠.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스는 사전트의 초기 작품들을 보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재능의 약간 '섬뜩한' 광경"이라고 묘사할 정도였습니다.

아래는 1877년과 78년에 그린 초기작품들입니다. 왼쪽에 있는 작품은 사전트의 어릴적 친구를 그린 초상화로 1977년 파리 살롱에 출품한 작품입니다. 물론 받아들여져 전시되었습니다.

《프랜시스 셔본 리들리 워츠》, 1877, 105 × 81.3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캉칼의 굴 채취꾼들》, 1878년,  77 x 121.6 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오른쪽은 그 다음해에 그린 풍경화입니다. 굴따러 가는 어부들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린 작품인데, 인상주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실 겁니다.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1874년에 열렸습니다. 사전트가 22살때입니다. 즉 사전트가 인상주의에 대해 몰랐을 수 없었을 겁니다. 인상주의자는 당시 파리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니까요. 실제로 사전트는 지베르니에 살던 클로드 모네를 방문한 적이 있었고, 아래와 같이 클로드 모네 부부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그림도 인상주의에 가깝죠.

《숲의 가장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클로드 모네》, 1885, 54.0 × 64.8 cm, 테이트 브리튼, 런던

실제로 존 싱어 사전트는 초상화가 아닌 경우 인상주의 화풍의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특히 풍경화는요. 그렇지만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사전트를 인상주의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클로드 모네도 사전트가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인상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사전트를 인상주의에 분류하는 분들은 "인상주의적 사실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전트는 평생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특히 사교계 여성들을 많이 그렸고, 본 모습을 잘 묘사하면서도 성격을 잘 묘사해주는 초상화로 유명했었습니다. 한마디로 여성들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장미를 든 여인》, 1882, 213 × 114 cm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세실 웨이드 부인》, 1886, 167.6 cm × 137.8 cm, 넬슨 아킨스 미술관 《로크노의 애그뉴 부인》, 1892, 127 cm × 101 cm,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여성들 초상화중 그에게 오명을 안겨준 작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마담 X의 초상》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모델은 프랑스 은행가의 아내인 비르지니 아멜리 아베뇨 고트로였습니다. 사교계의 여왕에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강했으며, 이런 저런 불륜 소문으로 유명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트는 고트로를 보자마자 푹 빠져서 한동안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거의 스토킹해서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워낙 고트로가 모델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공사 다망해서요. 거의 1년에 걸쳐 그렸습니다.

그림은 사전트도 고트로도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사전트는 이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초상화 의뢰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고, 고트로도 프랑스 사회에서 더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온갖 비난이 쏟아졌고 그녀의 피부가 "창백하고" "시체 같다"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나 야하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원래 그림은 드레스 오른쪽 끈이 아래로 흘러 내려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사전트는 나중에 현재의 그림처럼 어깨끈을 고쳐 그리기는 했지만 피해는 걷잡을 수 없었고, 초상화 의뢰를 거의 끊겼습니다. 그후 사전트는 영국으로 이주했고, 나머지 평생을 영국에서 살았습니다.

아래는 사전트가 영국으로 이주한 후, 가장 성공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입니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885년, 174 x 153 cm, 런던 테이트 브리튼

사전트는 평생을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영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귀족들과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의뢰는 거부할 정도로 인기있는 초상화가였습니다. 초상화 한점당 의뢰비는 당시 5,000 달러, 2008년 가치로 13만 달러정도였답니다. 대략 2억원 정도 되겠네요. 일년에 평균 14점을 그렸다고 하니 엄청난 수입입니다. 게다가 화실에 조수도 두지 않고 자기 혼자 모든 업무를 처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전트의 명성은 1900년도가 넘어가면서 꺽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부터 사진의 등장으로 초상화 시장이 줄어들었기도 하지만, 야수파입체주의와 같은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면서 미술 시장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와중에도 자신만의 사실주의를 고집한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치부되었기 때문입니다. 1926년 런던에서 열린 사전트 회고전에서는 "참으로 훌륭하지만, 이 훌륭한 솜씨가 예술가의 혼과 혼동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놀랍다."는 등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아래는 1899년작 《윈덤 자매: 엘초 자작부인, 아딘 부인과 테넌트 부인》입니다. 당시 영국 왕립미술원에 전시되어 "영국 왕립미술원 벽면에 수년 만에 등장한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평가 받았던 그림입니다. 후일 영국 국왕이 되는 에드워드 7세에게 "삼미신(The Three Graces)"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죠.

윈덤 자매: 엘초 자작부인, 아딘 부인과 테넌트 부인, 1899년, 292.1 x 213.7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사실 그 당시는 에콜 데 보자르 출신의 아카데미즘 화가들과 함께 사전트와 같은 "사교계 예술가"들이 깡그리 무시되었습니다. 특히 인상주의가 등장한 후인 18세기 말 파리 살롱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주류 화가들이 그렸던 역사화나 종교,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은 모조리 잊혀졌습니다. 

사전트는 1950년 정도부터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신고전주의 스타일의 당대 주류 화가들도 함께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죠.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그 당시 주류 예술가들은 주로 귀족의 취향에 맞춘 작품들이라 어쩔 수 없이 잊혀졌던 것이고 이제는 그에 대한 반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아름다운 그림들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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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냉정히 따져서 이 분이 제가 글을 써야 할 정도로 유명해야 하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그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이라면 "존 싱어 사전트"란 이름을 처음 들어보신 분들이 대부분일거고, 이 분의 그림중 어떤 그림을 봤을 때 딱 화가가 떠오르는 그런 작품도 없기 때문입니다. 초상화를 잘 그린 건 사실이고 매우 뛰어나기도 하지만 유럽에서 그려진 수많은 초상화와 섞어 두면 정말 이 작가의 그림을 찾아낼 수 있을까 싶고, 마찬가지로 인상주의적인 풍경화들도 다른 수많은 인상주의 작품과 섞여 있으면 구분해 낼 수 있을 만큼 사전트 만의 독특한 게 있는지 싶습니다. 저도 똑 같이 "참으로 훌륭하지만, 이 훌륭한 솜씨가 예술가의 혼과 혼동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놀랍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분의 유명세는... 아마도... 당시에 드물었던 미국인 화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분의 작품이 소장된 곳이 거의 영국 아니면 미국만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요. 결국... 그림을 잘 그리긴 했지만 배불러서 치열함이 부족했다... 라고 말하고 싶네요.

위키백과 정리

아래는 제가 정리하기 전 틀:존 싱어 사전트의 상태였습니다. 세개만 링크가 있는 걸로 나오는데, 그중 마지막의 "은자"는 다른 문서가 잘못 연결된 겁니다.

아래는 제가 정리한 후의 결과입니다. 아래에 빨간색 링크, 그러니까 한글 문서가 없는 것은 언어 링크 수가 5 이하인 문서들입니다. 즉, 예를 들어 《네 명의 박사》의 영문 페이지에 들어가 보시면 영어 문서 외에는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페이지가 없습니다. 이렇게 5개의 언어로 된 페이지가 있는 경우(한글까지 합치면 6개 언어)에만 번역하기로 기준을 바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여기를 읽어보시면 됩니다. 간단히 틀:존 싱어 사전트의 영문판에 포함된 문서 중에서 언어링크가 5 이상인 문서만 번역한 후, 영어판 외에도 언어링크가 5이상인 문서가 있다면 프랑스어 등의 다른 언어 페이지를 번역하여 채워넣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민, 푸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