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공부/화가

모더니즘의 아버지 - 그림 자르기 달인 : 에두아르 마네

하늘이푸른오늘 2026. 5. 8. 00:22

에두아르 마네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분입니다. 물론 어떤 분을 한마디로 재단한다는 게 말이 안되긴 하지만요. 사실 저는 이 분을 싫어했었습니다. 인상주의를 만들다시피 한 장본인인데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또한 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풀밭 위의 점심식사》나 《올랭피아》가 미술학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는데, 제 눈에는 그다지... 별로... 라는 생각이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마네에 대한 글을 좀 더 읽어보고, 작품들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나서야, 에두아르 마네를 왜 "모더니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지 약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아주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판사였고 어머니는 스웨덴 국왕의 대녀였으니까요. 18살에 자신의 화실을 열었고, 1867년 만국 박람회에서 자신의 작품이 제외되자(당시 만국 박람회에는 예술품을 전시하는 구역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 옆에 자신만의 전시회를 따로 열었을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그냥 부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영향력이 있던 집안이었습니다.  사실 왠만한 사람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나 《올랭피아》에게 쏟아졌던 비난을 받았더라면 거의 재기가 불가능하였을텐데도, 꾸준히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척하여 현대 회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말년에는 친구였던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압력을 넣어 훈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과 논란

아래는 마네가 30세가 되던 해 발표한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입니다.  루브르 박물관 근처의 튈르리 정원에서 매주 열리던 음악회에 모인 파리 시민들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제일 왼쪽에 있는 사람은 에두아르 본인이고, 이외에도 마네의 지인들이 많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중앙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금발 소년은 마네의 의붓아들(아마도 마네 또는 마네 아버지가 친부)인 레옹 렌호프입니다.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Music in the Tuileries), 1862, 76 x 118 cm, 더블린 휴 레인 갤러리사

사실 그냥 이 그림을 보면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불러일으킨 분노의 종류를 우리가 상상하기란 어렵다"고 말한 전기 작가의 말을 이해하기 힘듧니다. 그냥 고전적인 기법의 그림으로 보이거든요. 얼토당토 않게 생각되지만, 제일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작품의 크기였습니다. 당시 대형 작품은 역사적인 사건이나 신화 혹은 성경의 내용을 담은 내용만 그려졌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현대적인 내용을 크게 그린 것은 이 그림이 그러한 주제들의 가치에 도전하거나 그의 동시대인들을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해석될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일상적인 내용을 대형 포맷으로 그린 것은 사실주의 화파의 수장인 귀스타브 쿠르베가 시작이었습니다. 아래는 쿠르베의 대표작인 《오르낭의 매장》입니다. 《튈르리 정원의 음악회》보다 훨씬 큰 그림이죠. 이 작품의 주제도 오르낭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치뤄진 평범한 사람의 장례식을 대형화로 그렸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그림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쿠르베는 유명인이 되었고 천재, "끔찍한 사회주의자", "야만인"으로 불리게 되었고요.

《오르낭의 매장》(A Burial at Ornans), 1849–50, 315 x 660 cm, 오르세 미술관

다음은 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인 《풀밭위의 점심 식사》입니다. 이 그림도 엄청난 비난을 받은 그림입니다. 물론 역사나 신화가 아닌 주제를 대형 화폭으로 그렸기 때문에 비난받은 건 당연하고, 특히 가운데 벌거벗은 채 관객을 바라보는 여성때문에 많은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르네상스 시절부터 여성 누드화는 일반적인 그림이었지만, 그러한 누드화는 대부분 비너스프시케와 같이 신화 속 여성을 그렸습니다. 이 작품처럼 현실의 여성을 누드로 그려 공공장소에 전시한 것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정장을 한 남자들 사이에 있는 벌거벗은 여자가 "음란하다" "퇴폐적이다" 등등의 욕을 먹었죠. 

《풀밭위의 점심 식사》(The Luncheon on the Grass, 1863, 208 x 264.5 cm, 오르세 미술관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부분은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 위에 삽입된 그림은 워낙 축소된 상태라 잘 안보이지만, 여러 군데가 큰 붓질로 칠해져 있습니다. 그때까지의 아카데미즘 미술 작품들은 인물이나 배경 모두 매우 세밀하게, 그리고 매끄럽게 칠하는 게 당연한 기법이었는데, "대충대충 칠한 듯"한 이 그림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미완성 혹은 스케치... 라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는 붓질이 마치 "바닥 대걸레"로 칠한 것처럼 보인다고 평한 비평가도 있었습니다. 아래는 배경중 일부를 확대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이처럼 붓질의 흔적이 보이는 그림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번째... 그리고 가장 큰 논란을 일으켰던 작품은 《올랭피아》였습니다. "올랭피아"가 당시 매춘부가 흔히 사용하던 가명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당시 파리의 매춘부를 묘사한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도 역사화나 신화를 묘사한 그림이 아니면서도 대형 화폭에 그렸다, 당대의 파리의 현실을 그렸다, 게다가 매춘부를 그렸다는 것 등등 온갖 이유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올랭피아》(Olympia), 1863–1865, 130.5 x 190 cm, 오르세 미술관

사실 이 그림은 16세기의 유명한 그림인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4년경)를 오마주한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도 사실 이름만 비너스였을 뿐, 당대의 여자를 묘사한 그림이었습니다. 하지만, 《올랭피아》는 《우르비노의 비너스》에 등장하는 소품등을 모두 뒤집어, 매춘부를 노골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에는 여성의 발치에 "충절"을 상징하는 강아지가 있는 반면, 《올랭피아》의 발치에는  밤의 난잡함과 연관되는 검은 고양이로 대체했습니다(프랑스어로 고양이( chatte)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속어라고 합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Venus of Urbino), 1534년, 119 x 165 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에두아르 마네와 인상주의

이상에서 보신 것처럼 에두아르 모네가 비난을 받았던 이유는 크게 두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당시 주류 미술계는 역사화/신화화/종교화만을 대형 화폭에 담았는데, 마네는 당대의 현실습을 대형 그림으로 그렸다.
  • 상세하고 미묘한 디테일없이 큰 붓질로 칠하여 "대충대충" 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마네의 화풍이 바로 "모더니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이유입니다. 당대 많은 사람들이 모네의 화풍을 싫어했지만, 진보적인 예술가들로부터 새로운 양식으로 찬사를 받았고, 이러한 작품들은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으로 향하는 돌파구를 연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마네는 에드가 드가,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베르트 모리조,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 등과 만나 친분을 쌓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새로운 미술의 방향을 토론하게 됩니다. 이들은 나중에 바티뇰 그룹(Le groupe des Batignolles)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결국 이 그룹이 인상주의를 만들게 됩니다. 마네는 예술가들이 살롱 드 파리에 전시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1874년부터 8회에 걸쳐 열린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한번도 작품을 함께 전시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인상주의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위의 세 작품이 가장 유명하지만, 인상주의 그룹들과 어울리면서 인상주의 풍경화도 여럿 그렸습니다. 아래를 보시면 대부분 1870년대 초,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시작되기 직전에 그려진 그림들입니다. 마네는 이후 자신이 원래 추구하던 스타일로 되돌아갔습니다. 당시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함께 야외 사생을 다니곤 했는데, 《떠다니는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에서 그 편린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례식》, 1867-1870, 72.7 x 90.5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떠다니는 작업실에서 그림 그리는 모네》, 1874년, 82.7 x 105.0 cm, 노이에 피나코테크
크로케 경기》, 1873년, 72 x 106 cm, 슈테델 미술관 부채와 여인》, 1873년, 113.5 x 166.5 cm, 오르세 미술관

그래서 마네가 어떤 사조의 화가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인상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인상주의로 분류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림 자르기의 달인 

많은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파쇄합니다.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안들 때, 특히 초기에 제작한 연습 작품은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죠. 멀쩡한? 작품을 자르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마네는 이 이상한 짓?을 여러번 했습니다.

처음은  1860년대, 마네가 스페인 문화와 스페인 예술에 빠져있던 시기에 제작한 작품으로, 《투우 에피소드》라는 대형 작품을 제작하다가 반으로 잘라서 아래와 같이 두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림의 배치로 보아, 《투우》가 《죽은 투우사》 의 윗부분인 듯 싶은데, 《투우》의 가로 길이가 《죽은 투우사》보다 짧은 것으로 보아, 그냥 가로로 자른 게 아니라 좌우측도 잘라냈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 두 그림의 스타일이 많이 다른데, 《죽은 투우사》는 대대적인 재작업을 거쳤다고 하네요.

투우》(The Bullfight), 1864/1865, 47.9 x 108.9 cm, 뉴욕 프릭 컬렉션 죽은 투우사》(The Dead Man), 1864/1865, 75.9 x 153.3 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다음은 1868-69에 제작한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입니다. 원래 합스부르크 왕가의 핏줄이었는데 프랑스가 멕시코를 점령하던 시기에 나폴레옹3세의 권유로 멕시코 황제로 즉위했다가 독립전쟁에 휩쓸려 처형당한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인데, 프랑스 정부 정책을 비난한 작품이라 나폴레옹 3세 재위 기간 동안 파리에서 공개 전시가 금지된 작품이었습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The Execution of Emperor Maximilian), 1868-69, 252 x 305 cm, 독일 만하임 미술관

이 작품은 여러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위의 만하임 버전외에도 작은 규모의 코펜하겐 글립토테크 미술관 버전과 유화 습작인 보스턴 미술관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버전은 보시는 것처럼 여러 개로 잘라져 팔려나간 것을 에드가 드가가 수집해 다시 재조립한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군데가 빠진걸 볼 수 있죠. 특히 사형수 3명중 2명이 잘려나간게 가슴이 아프네요.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1867–1868), 193 × 284 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또 한가지 절단된 작품은 《카페 콩세르의 한 구석》과 《카페에서》입니다. 아래는 대충 위치를 맞춘 건데, 오른쪽 그림은 자른 뒤에 발레리나와 악단 등의 배경 등을 재작업하였다고 합니다.

《카페에서》(At the Café), 1878, 78 × 84 cm, 암 뢰머홀츠 미술관 카페 콩세르의 한 구석》(Corner of a Café-Concert), 1878-1879년경, 98 x 79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이렇게 자기 작품만 잘라서 재작업한 것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작가의 마음이죠. 그런데, 자기 작품이 아닌 에드가 드가에게 선물받은 초상화 《에두아르 마네 부부》 까지 마음에 안든다고 잘라버렸습니다. 아내인 쉬잔 마네의 모습이 영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죠. 그후 《피아노를 치는 마네 부인》을 그렸습니다. 에드가 드가는 잘린 그림을 보고 기함해서 돌려받은 후, 우측에 캔버스를 덧대었는데 결국 죽을 때까지 재작업은 하지 않아서 빈 캔버스로 남았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부부》(Monsieur et Madame Edouard Manet), 1868, 65 x 71 cm, 기타큐슈 시립 미술관 피아노를 치는 마네 부인》(Madame Manet at the Piano), 1867년~1868년, 38 x 46.5 cm, 오르세 미술관

마지막 대표작

제가 원래 어떤 작가에 대한 글을 쓰면 그 작가의 대표작이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제 마음에 드는 그림을 맨 마지막에 소개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중에는 그다지 끌리는 게 없네요.

아래는 마내가 매독 합병증 수술 후유증으로 죽기 1년 전에 그린, 말년의 대표작인 《폴리베르제르의 바》입니다. 이 작품도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원래 이 그림의 뒷 배경은 바텐더 뒤에 있는 거울에 비치는 광경을 그린 것인데, 바텐더의 위치와 거울에 비친 바텐더 위치가 다르다는 점. 그리고 거울에 비친 바텐더는 실크햇을 쓴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정면 부분엔 이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에 마네가 그린 그림 속 배경과 인물을 재현하고, 똑같은 구도와 시점에서 촬영한 재현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실 그대로 반영한 표현임이 밝혀졌습니다.

《폴리베르제르의 바》(A Bar at the Folies-Bergère), 1882년, 130 x 96 cm, 런던 코톨드 갤러리

그밖에 이 그림 왼쪽위에 있는 다리는 이 술집 상공에서 손님들을 굽어보며 공연하는 공중그네 달인의 발이 있고, 바텐더 앞에 있는 오렌지는 이 바텐더가 매춘을 암시한다는 등 몇가지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습니다. 

위키백과가 알려주는 에두아르 마네의 10대 대표작

아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중에서 위키백과 언어링크수가 높은 순서로 정렬한 10개의 작품입니다. 아직까지 이중에는 직관한 작품이 하나도 없네요.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이중 4점이나 볼 수 있으니... 올 겨울에는 꼭 가봐야 할텐데... 싶습니다.

위키백과 정리

아래는 제가 정리하기 전 틀:에두아르 마네의 상태였습니다.

아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언어링크 수가 5 이상인 작품은 모두 번역했고, 언어링크 수가 5 이상임에도 영어 위키백과에 없는 문서는 프랑스어 위키에서 번역해서 넣었습니다. 빨간색 박스가 프랑스어 위키에서 번역한 페이지입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