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공부/화가

한 시대를 좌우했던 화가: 장레옹 제롬

하늘이푸른오늘 2026. 8. 30. 12:51

붉은 색과 암회색 대리석이 둘러싼 원형 경기장에서 황금 투구를 쓴 검투사가 쓰러져 있는 검투사를 발로 밟고 서서 관중석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엔 흰 베일을 두른 여인들이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하고 열광적으로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림 관람객에게도 그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죽여라! 죽여라!"

2000년도에 상영된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떠올리게 하는 한 장면입니다. 실제로 이 영화를 제작한 리들리 스콧은 장레옹 제롬이 그린 이 《폴리케 베르소》를 모티프로 이 장면을 구성했다고 합니다.

《폴리케 베르소》(Pollice Verso), 1872년, 96.5 x 149.2, 미국 피닉스 미술관

장레옹 제롬은 역사화오리엔탈리즘 화풍에 능숙했던 아카데믹 미술 양식의 화가였습니다. 바로 전에 소개시켜드린 알렉상드르 카바넬, 그리고 장 루이 에르네스트 메소니에와 함께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프랑스 제2제국에서 가장 성공한 3명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래는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이집트 원정 당시 모습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뒤에 있어야 할 피라미드가 안보입니다. 그와 함께 있어야 할 군대의 모습도 안보입니다(좌측 아래의 그림자로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직 구름 없는 하늘, 거대한 얼굴이 솟아오른 고운 모래언덕, 그리고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한 남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Bonaparte Before the Sphinx), 1886년, 61.6 x 101.9 cm, 미국 캘리포니아주 허스트 캐슬

당시 아카데믹 미술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공식화된 장르의 위계를 철저히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회화중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사화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당시의 그림은 주로 왕실과 귀족을 위해 그려졌기 때문에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역사화, 역사적으로 중요한 주제, 종교적, 신화적, 알레고리적 주제를 포함
  • 초상화
  • 풍속화 또는 일상의 장면
  • 풍경화 및 도시 풍경화
  • 동물화
  • 정물화

하지만 당시 상황은 이미 단순한!! 역사화만으로는 시장을 사로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는 누드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아래는 고대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여성 노예를 경매에 붙이는 장면을 묘사한 《로마 노예 시장》과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입니다. 한 점은 여성의 뒷모습, 다른 한점은 앞 모습을 그려서 대략적으로 반대 방향에서 그린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노예 시장》(A Roman Slave Market), 1884년, 64.1 x 56.9 cm, 미국 볼티모어 월터스 미술관  고대 로마의 노예 시장》(Slave Market in Ancient Rome), 1884년경, 92 x 74 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

장레옹 제롬은 사실 당시 아카데믹 미술의 대표자이기도 했지만 아카데믹 미술이 서서히 힘을 잃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불행했던 화가였습니다. 위 그림도 제7회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의 중간인 1884년에 그려졌습니다. 프랑스 제2제정이 1870년으로 막을 내리고 왕족도 귀족도 힘을 잃자 역사화는 발 붙일 곳을 잃었고, 이들을 대체하고 나타난 부르주아지들은 역사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막 등장한 인상주의에 눈을 돌릴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제롬은 역사화를 빙자한 누드화로 살아남으려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레옹 제롬의 작품은 19세기 말까지는 상종가를 치다가 20세기 초가 되면서 거의 "똥값"으로 떨어집니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뱀을 부리는 사람》의 경우 1880년 맨처음 거래될 때는 7만5천 프랑에 팔렸고, 1888년 다음엔 1만 9천 달러에 판매했는데 1942년에는 500달러에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장레옹 제롬만의 경우가 아니라, 아카데믹 미술에 집중했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결국 20세기 초가되면서 입체파 야수파와 같은 모더니즘 예술이 등장하면서 잊혀지게 된 결과입니다.

물론 20세기 후반에는 장레옹 제롬을 비롯한 아카데미즘 화가들의 평가가 반전됩니다. 작품 가격도 예전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고요. 아마도 "아무리 쳐다봐도 뭘 그린 건지 모르겠다" 싶은 추상 미술의 반작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래 그림은 정말 제롬 답지 않은 《두 명의 존엄》입니다. 백수의 왕 사자가 사막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절벽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명의 존엄》(The Two Majesties), 1883년, 69.2 x 128.9 cm, 미국 밀워키 미술관

제롬도 다른 아카데믹 미술 화가들 처럼 인상주의를 싫어했습니다. 여성 미술 학생들의 에콜 데 보자르 입학을 반대했을 정도로 꼴통 보수주의자였습니다. 1894년, 귀스타프 카유보트가 죽으면서 자신이 수집한 작품들을 국가 소유의 박물관에 전시한다는 조건하에 유증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는데, 이를 반대하여 논란을 일으키키도 했습니다. (이 카유보트 컬렉션은 결국 오르세 미술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두 명의 존엄》속 사자처럼 자신의 영광이 스러져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위키백과가 알려주는 장레옹 제롬의 10대 대표작

장레옹 제롬의 대표작 10점은 모두 언어링크수가 10 이상이네요. 장레옹 제롬이 우리에겐 별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결과만을 놓고 보면 얼마나 대단한 화가인지 알겠네요. 

위키백과 정리

아래는 제가 정리하기 전 틀:장레옹 제롬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여러 작품들이 정리된 상태였네요.

아래는 제가 정리한 후, 현재의 상황입니다. 언어링크가 1개~2개 인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사진도 바꿨습니다. 20대의 싱그러운 얼굴을 말년의 고집스러운 얼굴로요. :)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