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순간조차 빛을 쫓았던 집념의 화가: 클로드 모네
클로드 모네는 가장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입니다. 사실상 인상주의를 개척했다는 의미에서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고, 평생 인상주의 철학에 따라 그림을 그렸던 (제가 생각하기에는) 유일한 화가였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18살이던 1858년에 풍경화, 특히 해양 풍경화를 그리던 외젠 부댕(당시 33세)을 만나 야외 사생을 배웠습니다. 함께 그림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아래가 그 당시 그린 《루엘에서 본 풍경》입니다. 깔끔한 풍경화네요. 그외에도 정물화도 그렸는데 그다지 많은 칭찬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클로드 모네는 정통 아카데미즘 교육을 싫어하고, 이론에서 벗어나 "나는 새가 노래하듯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식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는 않았지만(혹은 못했지만), 아카데미 쉬즈, 샤를 글레르 등의 스튜디오에서 미술을 배웠고, 이때 만난 친구들 (카미유 피사로, 오귀스트 르누아르, 프레데리크 바지유 등)과 함께 자유롭게 야외에서 공동 작업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세부묘사보다는 짧은 붓질로 "빛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스타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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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타드레스의 요트 경주》(Regatta at Sainte-Adresse), 1867년, 101.6 x 75.2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까치》(The Magpie), 1868–1869, 89 x 130 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1870년, 클로드 모네는 자신의 모델이었고 첫 아들을 낳아준 카미유 동시외와 함께 보불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망명을 떠납니다. 이때 모네는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를 만났고, 그는 존 컨스터블 과 JMW 터너 의 작품을 보고 감탄합니다. 이들의 작품은 클로드 모네의 인상주의 화풍을 확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존 컨스터블에게 "마치 색을 띤 수증기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는 평을 들었던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안개속에 파묻힌 듯한 화풍은 클로드 모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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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 대서부 철도》(Rain, Steam and Speed – The Great Western Railway), 1844년, 91 x 121.8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검은색과 금색의 야상곡 - 떨어지는 로켓》, 1872-1877년경, 60.3 x 46.6 cm, 디트로이트 미술관 |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열리고,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출품하여 온갖 욕이란 욕은 다 듣습니다. 심지어는 "벽지도 이런 바다 풍경보다 낫다"는 평가까지 받았습니다. 이 그림때문에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유명하죠.

전통적인 아카데이즘 출신의 예술가들이 보았을 때 이 그림은 스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니 당시 사람들이 욕을 해댄 것은 당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래는 비슷한 시대에 제작된, 파리 살롱에 가면 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이런 작품만 보다가 모네의 작품을 본 사람들이라면 당연시 그림도 아니라고 했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맨 오른쪽 그림은 메트로폴리탄 특별전에 전시되었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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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Echo), 알렉상드르 카바넬, 1874, 97.8 x 66.7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새벽》(Dawn), 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1881, 214.9 x 107 cm,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 미술관 | 《봄》(Springtime), 피에르 오귀스트 코트, 1873년, 213.4 x 127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클로드 모네는 초상화 또는 인물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인상주의는 인물화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의 그림과 아래의 그림을 보시면 당시 사람들도 모네에게 초상화 의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 같네요. 1875년부터 인물화를 나름 열심히 그렸다고는 하는데, 그다지 유명한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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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 양산을 든 카미유》, 1876, 81 × 60 cm, 개인 소장 |
《미셸 모네의 초상》, 1878, 46 x 37 cm, 파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 레옹 펠티에, 1879, 56 x 38 cm, 개인 소장 |
인상주의자이면서 인물화, 특히 여성을 많이 그렸던 르누아르와는 이런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 왼쪽의 《토르소, 햇빛 효과》의 경우엔 인상주의 스타일이 확실하지만 그 이후로는 르누아르는 적어도 인물에는 인상주의 기법(짧은 붓터치, 빛의 포착)을 포기했습니다. 즉, 배경은 인상주의 스타일로 그리더라도 인물 묘사는 정확하게, 자신이 평소에 존경했던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 스타일의 영향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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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르소, 햇빛 효과》(Torso, effect of sun), 오귀스트 르누아르, 1875-1876, 81 x 65 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이레느 카앙 당베르의 초상》(Portrait of Irène Cahen d'Anvers),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0년경, 65 x 54 cm, 취리히 E.G. 뷔를레 컬렉션 | 《파란 리본을 한 젊은 여인》(Young Woman with a Blue Ribbon), 오귀스트 르누아르, 1888, 55 x 46 cm, 리옹 미술관 |
모네의 작품중 유명한 작품은 거의 풍경화입니다. 사실 인상주의 자체가 야외 사생에서 출발하여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풍경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빛의 효과를 잘 포착한 작품들이 모네의 연작입니다.
모네의 후기에서는 하나의 대상을 여러 계절과 시간, 조명 조건에 따라 별도로 묘사하는 연작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시작은 1877년의 《생라자르 연작》입니다. 《생라자르》연작은 1877년 4월 5일에 열린 제3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총 12점 중 7점이 전시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같은 장소의 많은 그림을 신중하게 장면과 시간을 조율하여 동기화"한 첫 사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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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cm × 105 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 81.9 cm × 101 cm, 미국 케임브리지 포그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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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6 cm × 80.2 cm, 미국 시카고 미술관 | 53 cm × 72 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
모네는 가난에 시달리면서 그림을 그렸으나, 1890-91년에《건초더미》 연작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재정적으로 안정되면서 지베르니에 집과 정원을 마련하고 수련 연작을 그렸고, 영국과 베네치아로 여행하면서 《루앙 대성당》(1892-94), 《영국 국회의사당》(1900-05), 베네치아 《산조르조마조레》(1908-12) 등 다양한 연작 그림을 제작했습니다.

아래는 일본 동경 아티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황혼의 산조르조마조레》입니다. 왼쪽에 있는 높은 종탑이 산조르조 마조레 성당이고, 오른쪽에 희미하게 보일듯 말듯한 건물은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입니다. 인상주의 특징이 정말 잘 살아 있어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위 그림은 대략 아래의 위치와 방향으로 그렸습니다. 아직까지 베네치아를 한번도 못가본 게 아쉬운데, 언젠가 갈 기회가 된다면 저 장소는 꼭 가보고 싶네요.

모네의 연작중 가장 유명한 것은 《수련》연작입니다. 모네는 1883년부터 파리 북서쪽 약 80km 떨어져 있는 지베르니에 집과 정원(현재 클로드 모네 재단)을 마련하고, 정원을 관리하며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30여년간 약 250여점의 수련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래는 그중 4점으로, 좌측 아래에 있는 작품은 이건희 컬렉션에 속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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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련 - 저녁효과》(Water Lilies ~ Evening Effect), 1897~1898, 73 x 100cm, 파리 마르모탕 모네 박물관 | 《일본식 다리와 수련이 있는 연못》, 1899, 89 x 93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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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련이 있는 연못》, 1917~1920, 100 x 200,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 《수련, 수양버들의 잔상》, 1916~1919, 130 x 200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1890년대에 그려진 위의 두 그림은 일반 풍경화라고 할 수 있지만, 그로부터 15년 정도 지난 아래쪽 두 그림은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랑하는 아들 장 모네가 죽은 1914년경에 시작된 백내장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데, 백내장의 영향 아래 제작된 그의 그림들은 20세기 미술 및 현대 추상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모네는 평생 인상주의라는 외길을 걸은 화가입니다. 심지어는 첫번째 아내 카미유 동시외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 모습을 화폭에 담을 정도였습니다.
오른쪽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임종을 맞은 카미유》입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Claude Monet라는 서명의 T에는 하트표시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에만 유일하게 이런 서명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앞에서도 무의식중에도 빛의 변화를 쫒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모네는 그날의 심정을 아래와 같이 남겼습니다.
어느 날 새벽, 저는 제게 너무나 소중하고 영원히 그럴 사람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제 시선은 비극적인 관자놀이에 고정되었고, 저는 죽음이 얼굴에 남기는 미묘한 색조의 그림자 속에서 죽음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파란색, 노란색, 회색, 아시다시피. 저는 그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당연히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욕망이 제 마음속에 뿌리내렸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소중하고 친숙한 얼굴을 그리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전에, 제 몸은 색채의 충격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설령 죽음을 앞두었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예술가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생애에 성공을 하던, 죽음 후에 알려지던 그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죠. 물론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이 더 많지만, 무명의 예술가들도 그들만의 노력으로 이 사회를 가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제가 정말로 예술가라고 불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메리 카사트입니다. 그 반대에 서있는 분이 클로도 모네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클로드 모네는 존경하고 싶은 사람 중 한 분입니다.
위키백과 정리
클로드 모네에 관한 위키백과는 제가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도 아래처럼 이미 작성되어 있는 글들이 많았습니다.

아래는 제가 정리를 마친 상태입니다. 영어 위키백과에 있는 모든 모네 작품은 번역했고, 언어링크수가 5 이상인데도 영어 위백에 없는 경우는 프랑스어 위키에서 찾아서 번역해 추가했습니다. 아래 빨간색이 추가한 작품인데 총 10점이 추가되었네요.

이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