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선 고독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
저는 상징주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느껴보라고 강요하는 현대미술보다, 때로는 사실적으로 때로는 과장되게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고전주의 회화보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이런 걸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툭 던져주는 상징주의가 제일 마음에 듭니다.
귀스타브 모로는 상징주의 화가중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상징주의적 다면성을 최고조로 끌어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 분입니다. 그가 상징주의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 시점은 그가 제일 친하고 좋아했던 5살 많은 낭만주의 화가 테오도르 샤세리오가 겨우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해인 1856년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도 당시 대부분의 화가처럼 에콜 데 보자르에서 아카데미즘 미술을 배우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외젠 들라크루아와 테오도르 샤세리오를 만나 낭만주의 그림을 그렸던 분이었습니다.
아래는 그 시절 1853년 파리 살롱에 출품하여 호평을 받은 《아가》입니다. 솔로몬왕이 지었다고 알려진 성경 아가서(아름다운 노래라는 뜻) 의 내용중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찾으러 나섰다가 술에 취한 도시의 야경꾼들에게 공격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그림은 낭만주의에 가깝습니다. 전체 구도의 통일성보다는 개별 등장요소를 극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요. 다만 색감에 있어서는 화려한 팔레트를 추구한 낭만주의 보다는 조금 어두운 듯하고, 이는 귀스타브 모로가 평생 추구했던 감각이었습니다(물론, 150년 이상된 그림이다보니 그 동안 물감이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무채색에 가까워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미술관에 간 화학자를 참고하세요)
귀스타브 모로의 최고 대표작은 아래에 있는 1864년 작품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입니다. 오이디푸스가 테베로 들어가는 길에 스핑크스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오후에는 두 발로, 밤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수수께끼를 내는 장면이죠.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스핑크스는 '여성의 머리에 사자의 몸, 독수리의 날개, 꼬리가 뱀'인 괴물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러한 외모는 인간의 지혜(여성의 머리)와 지상의 지배력(사자의 몸), 그리고 하늘의 신성한 권능(독수리의 날개)이 기괴하게 뒤섞인,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공포와 경외심의 상징이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 그림의 스핑크스는 "공포와 경외심"이라기 보다는 에로틱해보입니다. 특히 얼굴부분만 확대해 보면 연인들이 속삭이는 모습에 가까워보입니다.
원래 귀스타브 모로는 어릴때부터 고전 교양 독서를 즐겨서 매우 교양이 풍부하고 박학다식했으며, 1,600권 이상의 개인 장서를 보유한 독서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를 사로잡았던 주제중의 하나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나오는 살로메였습니다.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헤로데는 이복 동생의 처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는데, 세례자 요한이 부도덕한 결혼이라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헤로데의 생일 잔치에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가 춤으로 헤로데를 기쁘게 하자, 무엇이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에 살로메는 헤로디아의 부탁에 따라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아래는 살로메를 주제로 한 여러 그림 중 가장 유명한 《현현》입니다.

이 그림의 중심은 그림 중앙에 빛을 발하며 떠있는 피를 흘리고 있는 요한의 머리입니다. 초현실적이죠. 그리고 헤로데 왕과 왕비, 연주자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처형인 등이 이 머리를 보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호합니다. 실제로 머리가 나타난 것인지 살로메 혼자 보는 환상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만약 고전주의 그림이었다면 모든 등장인물이 머리를 보고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숨거나... 그런 모습을 그렸을 것입니다. 이처럼 귀스타브 모로가 추구했던 상징주의는 모호함이었습니다. 관객이 상상으로 이야기를 채우도록 의도한 것이었죠.
아래는 모로가 살로메 주제로 그렸던 다른 그림들입니다. 이 그림들을 보면, 얼마나 모로가 살로메에 집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이후,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귀스타브 모로는 거의 칩거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그림만 그렸습니다. 살롱 전시를 중단했고 해외 전시도 거부했고요. 물론 훌륭한 작품은 많았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조차 화실은 개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88년 에콜 데 보자르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나 교수직은 거부했는데, 임종을 앞둔 친구가 자신의 뒤를 이어 학교의 주요 화실 중 하나를 맡아달라고 요청해서 1891년 10월 마지못해 교수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는 야수파로 유명한 앙리 마티스를 비롯해 유명한 화가를 배출했습니다. 모로는 자신의 견해나 스타일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려 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 자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들 자신의 아이디어를 따를 수 있도록 격려했다고 합니다. 앙리 마티스가 자신의 스타일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에 모로의 역할도 컸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은 입체파와 야수파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의 등장으로 잊혀졌습니다. 사실 그 이전 사실주의나 고전주의를 추구했던 수많은 정통파 화가들이 구시대적이라고 치부받으며 잊혀졌죠. 모로가 다시 기억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였습니다. 초현실주의가 등장하면서 오딜롱 드롱과 그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로 추앙하면서였습니다.
위키백과가 알려주는 귀스타브 모로의 10대 대표작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귀스타브 모로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고전주의에 가깝습니다. 오히려 나머지 그림들이 훨씬 더 상징주의에 가깝죠.
모로는 죽기 전 자기 작품을 정리하고, 자기 집과 작품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국가에서 미술관으로 운영해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국립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입니다. 그래서 몇몇 대표작을 제외하면 그의 작품은 거의 모두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올 겨울에는 꼭 파리에 가고 싶은데.... 환율이 너무 비싸서 고민입니다. ㅠㅠ

위키백과 정리
아래는 제가 정리하기 전 틀:귀스타브 모로의 상태였습니다.

아래는 현재의 상태입니다. 영문 위키에 별도의 페이지가 있는 문서는 모두 번역했고, 기타 언어링크수가 5 이상인 작품중 영문 위키에 없는 작품의 경우 별도로 프랑스어 위키에서 번역했습니다. 아래에 빨간 박스가 프랑스어 위키에서 번역한 문서들입니다. 제가 번역하는 기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이상입니다.